여름은 미화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주 떠오릅니다. 청량한 하늘, 푸른 이파리들, 만개하는 여름꽃들, 시원한 계곡과 여름의 해변. 그러나 막상 그 계절 속을 살 때면 푹푹 찌는 더위와 매일 울리는 폭염특보 알림, 시원한 에어컨 뒤에 따라오는 전기세로 우리의 생각 속 여름은 미화된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그 미화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고 살아왔던 그 계절이, 계절 속의 우리가 눅눅하게만 기억되면 평생 여름을 피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게 될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미워진다면, 미워하는 것을 절대 피할 수 없다면.
망각은 신이 준 선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저 말을 생각할 때면 '그럼 기억은 신이 준 벌인가?' 라는 생각을 잠깐씩 해보고는 합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늘 같습니다. 여러분의 답은 어떤 건가요? 제 답은 망각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기억은 살아온 날들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추억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고요. 그러나 어떤 기억은 잊혀지지 않아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지워내려고 애쓸수록 더욱 깊게 박히는 그런 기억. 저도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기억을 내게 만들어준 사람들을 원망했고 다음에는 믿지도 않는 신을 원망했고 그러다 결국 스스로를 증오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사람을, 신을, 스스로를 원망하냐고요? 아니요. 지금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증오하지도 않고요. 오히려 저 스스로를 아껴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수 백 번, 수 천 번 반복했습니다. 포기하고 싶기도 했죠.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어서 넘어진 채로 몇 년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어서는 걸 선택했습니다. 알아버렸거든요. 지금 넘어지더라도, 휘청거리더라도 결국 회복될 것이라는 걸요. 이옥토 작가님의 <처음 본 새를 만났을 때처럼>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당신의 슬픔보다 먼저 끝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빛은 당신의 슬픔보다 먼저 끝나지 않아요"
그리 오래 인생을 산 것도 아니고 해봐야 20년인데 어떻게 감히 삶이라는 걸, 인생을 정의할 수가 있겠어요. 그건 너무 섣부른 판단이죠. 그러나 감히 삶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넘어지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해도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겨내고 때론 그저 버티며 살다보면 망각이 아닌 기억이 신이 준 선물이라고 바꿔 쓸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신을 믿지 않는 것 치고 꽤나 자주 언급하는 것 같은데 큰 의미는 없고 그저 우리에게 온 고통이, 아픔이 절대적인 누군가의 큰 뜻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덜 우울해지거든요. 우리는 평생을 사람과 부딪히며 살아야 하는데 그 모든 게 한 사람을 상처 주겠다는 타인의 뜻이고 의지이면 너무 슬프잖아요.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미워진다면, 미워하는 것을 절대 피할 수 없다면 너무 슬프니까요. 그냥, 사람을 덜 미워하고자 하는 저의 노력입니다.
8월입니다. 너무 슬프지 않게, 우울하지 않게,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주어지면 좋겠습니다. 더위에 지지 말고 모쪼록 몸 건강히, 다정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